장왕은 그 말을 듣고 화색을 띠며 말했다. "그렇게 해 봅시다. 당장 정을 쳐서 우리의 위세를 천하에 떨쳐 보도록 합시다." 이리하여 장왕은 손숙오를 원수로 삼고, 오거, 소종, 범산, 투월 네 장수를 대장으로 삼아, 자신이 친히 20만 대군을 이끌고 정나라로 쳐들어갔다. 이때 오거는 손자인 오자서를 함께 데리고 떠났다. 오자서의 나이 아직 20세가 안되었으나 남달리 총명하고 무예가 뛰어났기에 일찍부터 실전 경험을 쌓아주려고 한 것이다. 워낙에 힘이 약했던 정나라는 애초부터 초나라의 상대가 못되는 지라, 사흘만에 도성을 제외한 모든 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진나라의 왕 성공은 순임보를 원수로 삼아 자신이 직접 15만 대군을 이끌고 초군을 토벌하기 위해 나섰다. 그런데 장도에 오른지 이틀만에 커다란 불상사가 생겼다.
진왕 성공이 갑자기 진중에서 객사를 했던 것이다. 원수 순임보는 이를 크게 불길하게 여겨 군사를 회군하려 했다. 그러자 대장 한궐이 반대하고 나섰다. "정을 구하려고 장도에 나섰다가 이렇게 헛되이 돌아가면 장차 초의 기세를 어찌 당할 것입니까. 우선 대왕의 유해만 본국으로 봉송하고, 군사는 이대로 진군하여 초의 오만을 철저히 깨드려야 할 것입니다." 들어보니 맞는 말이었다. 원수 순임보는 원래 우유부단한 데다 판단력도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는 결국 대장 한궐의 말에 따라 다시 정나라를 향해 원정길에 나섰다. 진의 15만 대군이 십여 일이나 걸려 황하에 도달했을 때, 앞서갔던 척후병이 급히 달려와 보고 했다. "정이 구원병을 기다리다 못해 초에게 항복해 버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초는 지금 군사를 거두어 본국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진의 장수들은 그만 맥이 빠져 버렸다. 할 말을 잃은 순인ㅁ보가 주위 장수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초군이 이미 정에게 항복을 받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중이라고 하니, 이제 우리는 어찌하면 좋겠소?" 그러자 선봉장 선곡이 좌우를 둘러보며 목청을 높였다. "주위의 작은 나라들이 우리의 그늘로 모여들었던 것은, 그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의 구원을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 경우처럼 우리를 의지한 국가가 망하는 꼴을 그대로 방관한다면 이후에 어느 나라가 우리를 따르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철수하는 초군을 뒤쫓아 철저하게 쳐부숴야 합니다. 만약 초군을 공격하겠다면 소장은 선봉으로서 목숨을 걸고 꼭 큰 공을 세워보이겠습니다."
다른 장수들이 의견을 내놓지 않자 순임보는 선곡을 선봉장으로 삼고, 위기, 조전, 조영, 조괄 등을 대장으로 임명하여, 군대를 새로 편성해 황하를 건넜다. 선봉장 선곡은 워낙 성미가 급한지라, 황하를 건너기가 무섭게 초군의 뒤를 맹렬히 추격했다.한편 회군을 서두르고 있던 초군이 필이라는 곳에 이르렀을때, 척후병이 황급히 달려와 보고했다. "지금 진의 대군이 우리 군을 맹렬히 추격해 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보고에 초의 장수들이 당황한 눈빛을 보이자, 모사 오거가 장왕 앞에 나와 아뢰었다. "우리가 그 동안 진에게 업신여김을 당해왔으니, 이 기회에 지난날의 한을 모두 풀어야 할 것입니다. 마땅히 그들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장왕은 여전히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에는 그냥 돌아갔다가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것이 어떻겠소?" 오거는 단호했다. "적의 추격을 보고도 회군하는 것은 패주와 다를 바 없습니다. 결코 물러서서는 안됩니다" 장왕은 손숙오를 돌아보며 물었다. "원수의 생각은 어떠하오?" 손숙오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우리가 애초에 출병할 때, 진에서 구원병을 보내올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예측했던 일이옵니다. 이미 진과의 일전을 각오하고 선 길인데, 이제 와서 싸우느냐 마느냐 가부를 논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참으로 명쾌한 대답이다. 장왕은 내심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긴 그렇군. 만약 싸운다면 이길 자신은 있소?"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의 승리가 확실합니다" "여러가지 면이랴?"
손숙오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첫째로, 전쟁에서는 군사의 사기가 절대적인데, 진군은 그 출발부터 왕을 잃어 군사의 사기가 크게 떨어져 있습니다. 둘째로, 진의 원수 순임보는 통솔력이 부족한데다 병법에도 그다지 능숙하지 못하고, 셋째로, 선봉장 선곡은 공명심이 많고 교만하기 이를 데 없어서 다른 장수들과 화합하기 어려운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넷째로, 그들은 행군 도중에 군대를 개편했기에 상하의 명령 계통이 아직 확립되어 있지 못할 것이며, 다섯재로, 우리는 이미 승리를 거둔 개선군인 데 반해 진군은 주인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는 군대라는 것입니다. 그밖에도 진군에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산재해 있는지라 어렵지 않게 깨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장왕은 손숙오의 말에 힘을 얻었다. "이제부터 적을 맞아 싸울 테니, 모든 군사는 말 머리를 돌려 총 진군하라!". 군령이 떨어지자, 손숙오가 오거에게 말했다. "적의 선봉을 간단히 쳐부술 수 있는 분은 오 장군밖에 없으니 수고스러우시더라도 선봉장의 직책을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이에 출진 준비를 갖춘 오거가 손숙오에게 말했다. "적의 선봉 부대는 소장이 책임지고 격퇴할 것이오니, 원수께서는 좌우로 우회하여 황하에 먼저 가 계시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자 손숙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소, 나도 그럴 참이었소" 명장과 명장 사이에는 무언중에 통하는 바가 있었다. 그런데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청년 장수 오자서가 그말을 듣고 빙그레 미소짓는 것이 아닌가.
이윽고 선봉장 오거는 군사를 이끌고 말을 달려나가며 동행하는 손자 자서에게 물었다. "아까 내가 손 원수와 작전 계획을 의논하고 있을 때 네가 빙그레 웃는 것을 보았는데, 그래 지막 가는 것이 있더냐?" "제 짐작이 틀릴지도 모르겠지만...., 할아버님께서 적의 선봉부대를 무찔러 버리면 패잔병들은 모두 황하로 쫓겨갈 것이고, 그때 원수님의 군사가 황하에 먼저 가 있다가 적의 패잔병들을 닥치는 대로 몰살시켜 버릴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오거는 손자의 말을 듣고 가슴이 벅차 올랐다. 설마 나이도 어린 손자가 자신의 계획을 그렇게까지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자서야! 네가 병법에 그토록 밝을 줄은 몰랐구나. 이번 출진에 너를 데리고 온 것이 참으로 잘한 일인 듯싶구나. 모쪼록 이번 기회에 실전 경험을 많이 쌓아 두거라."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할아버님, 좀 더 서두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적이 나타나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어찌 그리 서두르는 것이냐?"
"적과 마주치려면 아직 멀었지만, 우리가 먼저 목적지에 도착한 후 적을 기다리고 있다가 쳐부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오거 역시 빨리 가야할 필요성을 느끼고 진작부터 군사들에게 강행군을 독촉하고 있었다. 그런데 손자의 말이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고 있었으니, 또 한 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거는 말을 달려나가며 손자에게 넌지시 물었다. "네가 만약 선봉을 맡는다면, 너는 어느 곳에서 적을 맞아 싸우겠느냐?" 작전 계획은 이미 세워져 있었다. 다만 손자의 역량이 어느정도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자서의 대답에는 거침이 없었다. "여기서 70리쯤 더 가면 병저라는 깊은 골짜기가 있습니다. 우리 군사를 그곳에 매복시켜 두었다가 적이 그곳을 통과할 때 기습을 감행하면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적이 그곳에 먼저 와서 매복해 있다면 어떡하겠느냐?" 오거는 내심 손자의 말에 혀를 내두르고 있었지만, 별다른 내석 없이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그럴 염려는 없을 것입니다" "아니 어째서?" "그것은 적의 선봉장이 다름 아닌 선곡이라는 장수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