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곡은 매복 작전을 모르는 사람인 줄 아느냐?"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아까 어르신들께서 말씀하시길 선곡이라는 장수는 공명심이 남달리 많을 뿐만 아니라 매사에 몹시 서두르는 성품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사람이 추격해 오다 말고 한가롭게 산골짜기에 숨어서, 안 나타날지도 모르는 우리를 기다릴 리 없지 않겠습니까?" "음...." "두고 보십시오. 우리가 그곳에 매복해 있어도 선곡은 우리를 추격하는 데만 급급하여, 그 골짜기를 아무런 경계도 없이 단숨에 통과해 버릴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그때가 적을 섬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인 셈이죠." "오, 어느새 적장의 성격까지 감안해 작전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참으로 대견하구나. 그렇다면 오늘은 너의 작전 계획에 따라서 싸워보기로 하자." 오거는 손자의 사기를 돋워 주려고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이윽고 병저 계곡에 도착하여 군사를 매복시켜 놓고 나자, 오자서가 말했다. "할아버님, 여기서 위계 전술을 한 번 써 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위계 전술을?" "네, 위장 첨자를 적진 속에 침투시켜 적의 공명심을 불타오르게 하자는 것입니다. 위장 첨자로 하여금 '초군은 선곡 장군에게 겁을 먹고 급히 달아나고 있는 중' 이라고 거짓 보고를 올리게 하면, 선곡은 틀림없이 우리를 따라잡기 위해 이 골짜기를 의심 없이 통과할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대로 말입니다" 그런 위계는 오거조차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참으로 재미있는 계획이구나. 그러면 네 계획을 실천에 옮겨 보거라." 자서는 곧 위장 첩자 몇 명을 뽑아 적진에 침투시켰다. 이윽고 진군을 만난 위장 첩자는, '초군은 선곡 장군님의 위용에 겁을 먹은 나머지 지금 신속하게 퇴각하고 있습니다.' 라고 보고하니, 선곡은 기세가 더욱 등등해졌다. "적이 국경을 넘기 전에 모조리 섬멸해야 한다. 모든 군사들은 서둘러 추격하라"
얼마 후 병저 계곡이 눈앞에 다가오자, 부장 황진이 선곡에게 말했다. "이 계곡에 적이 매복해 있을지도 모릅니다. 조금 늦더라도 먼저 정찰을 해 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부장이 할 수 있는 당연한 조언이었지만, 적을 따라잡기에 급급한 선곡의 귀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겁에 질려 쫓겨가는 놈들이 무슨 복병을 매복해 두겠느냐. 저들이 국경을 넘기 전에 서둘러 따라잡아야 하니 모두들 지체하지 말고 나를 따르도록 하라!" 사슴을 쫓는 자는 산을 보지 못한다고 했다. 결국 어리석은 선곡은 오자서의 계략에 깊숙이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선곡의 부대가 비좁은 골짜기를 어지럽게 통과하기 시작했다. 초군은 숲 속에 죽은 듯이 숨어서 그 광경을 지겨보고 있다가, 적의 부대가 3분의 1쯤 계곡을 빠져나왔을 무렵, 불시에 사방에서 함성을 올리며 뛰어 나왔다.
계곡을 먼저 통과한 선곡은 그제야 복병에게 기습당한 것을 알아 차렸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숲속에서 오자서가 질풍같이 말을 달려나오며 장검을 번쩍 휘두르니, 선곡의 머리가 그대로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선곡은 죽었다. 후속 부대를 가차없이 섬멸하라!" 오자서의 말이 떨어지자, 진의 군사들은 저마다 혼비백산하여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협곡을 통과한 천여 명의 병사들은 등뒤에서 엄습해오는 복병들의 창검에 찔려 쓰러졌고, 이제 막 계곡을 통과하려던 4 천여 명의 병사들은 발길을 돌려 후방으로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망가는 병사들을 그냥 살려 보낼 복병들이 아니었다. 사방 팔방에서 함성을 올리며 덜미를 눌러오니, 진의 병사들은 나뭇잎이 위날리듯 쓰러져 죽어갔다.
그와 같은 일방적인 추격전이 계속되기를 무려 20여 리, 후방에서 진을 치고 있던 우너수 순임보가 급보를 듣고 급히 달려와 싸우려했다 그러나 물밀듯이 몰려오며 앞을 가로막는 패잔병들 때문에 병사들을 이끌고 나아갈 수가 없었다. 결국 순임보는 임술을 깨물며 황하까지 후퇴하라는 군령을 내렸다. 후속 부대의 좌익장군 사회는 전쟁이 불리하다는 비보가 날아노자, 황하 강가에 군선 8백여 척을 대비시켜 놓았다. 그것은 참으로 적절한 조치였다. 그러나 전세가 워낙 불리한 터라 15만의 대군이 한꺼번에 배를 타기 위해 몰려오는 데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병사들이 모두 배에 먼저 오르려고 아귀다툼을 하는 바람에 침몰한 군선만 무려 50여 척이나 되었다.
그와 같은 아비규환이 계속되고 있을 때, 일찌감치 황하에 선착하여 공격을 노리고 있던 심윤, 투월 등의 초군 부대마저 전후 좌우에서 ㅐ미 떼처럼 엄습해 왔다. 겁에 질려 스스로 강으로 뛰어들어 죽기도 했으니, 황하는 말 그대로 피바다가 되고 말았다. 진군이 고국을 떠날 때에는 15만의 대군이었지만, 황하를 무사히 건넌 것은 기병 8백여 기에 보병은 2만을 넘지 못했다. 이로써 진에게 오랜 세월 업신여김을 당해오던 초나라의 국위는 크게 선양되었고, 장왕의 이름도 중국 천하에 크게 떨치게 되었다. 고국으로 돌아온 장왕은 원수 손숙오와 대장 오거를 비롯하여 수많은 장수들에게 후한 상금을 내렸다. 이렇게 개선 장군들에게 논공 행상을 베푼 그날 밤, 장왕은 그들과 술잔을 주고 받는 자리에서 손숙오와 오거에게 말했다.
"손 영윤과 오 대부의 덕택으로 우리가 일찍이 없었던 큰 승이를 거두었소, 어떻소? 이 정도면 왕의 권위를 드높였다고 볼 수 있지 않겠소?" 그러자 손숙오가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그 옛날 우리는 송을 치려했다가 진의 구원병 때문에 실패하고 돌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기회에 송나라까지 쳐서 진을 고립시켜 버리면, 중원의 패권은 자연히 우리가 쥐게 될 것입니다." "영윤의 생각이 그렇가면 지금이라도 장장 송을 치기로 합시다. 송을 치는 것이라면 정을 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쉬운 일이 아니겠소?" 장왕은 곧 출동 명령을 내렸다. 송 역시 약소 국가인지라 별다른 저항도 펴지 못하고 거의 모든 성이 초군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이에 송왕 문공이 성에서 나와 항복하려 하자, 좌사구 악려가 반대하고 나섰다.
"옛날에도 우리는 초군에게 포위되었다가 진의 구원을 얻어 항복을 면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초군에게 항복해 버린다면 훗날 있을 진의 노여움을 무엇으로 막아내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항복을 하지 않는다면 머잖아 초군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고 말 것이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진에 사신으로 가겠소?" 이때 우대부 악영제가 나서며 말했다. "신이 가겠습니다. 신을 보내 주십시오" "고맙구려. 그렇다면 속히 다녀와 주오" 악영제는 성문을 빠져 나와 초군의 포위망을 뚫고, 사흘 밤낮으로 달려 무사히 진나라에 도착했다.
진왕 경공은 그렇지 않아도 초에게 이를 갈고 있던 터라, 즉시 출별하여 송을 구원하려 했다. 그러자 하대부 백종이 반론을 들고 나왔다. "얼마 전 우리는 초나라와의 싸움에서 이미 15만의 대군을 잃었습니다. 이제 다시 군사를 일으켜본들 초의 예기를 무슨수로 꺽겠습니까? 전쟁을 감정으로 치를 수 없는 일입니다." 이 대목에선 진왕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송을 구해 주지 않는다면 이후에 우리의 패권을 무엇으로 유지할 수 있단 말이오?" 백종은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입을 다물고 있더니, 이윽고 고개를 들고 말했다. "우선 사신을 송나라로 보내 구원병을 곧 보내줄 것처럼 안심을 시켜, 항복을 하지 않도록 속임수를 써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구원병이 온다고 하면 초에서 겁을 먹고 철수를 할지도 모르는 일이고, 설사 초가 끝까지 싸우려고 든다 해도 그때에 가서 대책을 강구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