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속 국가에게까지 속임수를 쓴다는 것은 졸렬하기 그지없는 계책이었지만, 워낙 사정이 다급한지라 진왕은 별 반대 없이 백종의 제안을 따르기로 했다. 그러자 늙은 충신 해양이 자원하고 나섰다. "노신을 보내 주신다면 목숨을 걸고 사명을 다하겠습니다." 이리하여 노장 해양은 막중한 임무를 띠고 송나라로 길을 떠났다. 그런데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초나라의 척후병들에게 사로잡히는 꼴이 되고 말았다. "너는 누구냐?" "나는 송왕을 만나러가는 진나라의 사신이다." 해양이 당당하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자, 깜짝 놀란 초의 병사들은 즉시 포박을 지워 장왕에게 올려 보냈다.
장왕이 대부 오거와 함께 해양을 만나보니, 한눈에 보아도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장왕은 즉시 해양의 포박을 풀게하고 대청으로 맞이했다. "철없는 아랫것들이 현인을 몰라보고 함부로 결박지었던 것이니 부디 용서해 주시오. 그런데 대부는 어디로 가는 길이셨소?" "나는 왕명을 받으러 송나라에 가서 초에게 항복을 하지 않도록 하려는 진나라의 사신이오." 해양은 자신을 회유하려는 술책임을 알고, 새삼 근엄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러자 장왕이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말했다. "대부는 현명한 분이시니, 송나라에 가시거든 어서 항복하여 성안의 백성들에게 무고한 피해가 없도록 권고하시는 것이 어떻겠소?"
그러나 해양은 의연한 자세로 대답했다. "대왕꼐서는 진나라의 원한을 사지 않으시려거든 지금이라도 군사를 철수시켜 무고한 백성들에게 피해가 미치지 않도록 하십시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면 구원병이 올 때까지 송나라 군사들을 이끌고 목숨을 걸고 싸우겠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오거가 결국 참다못해 장왕에게 큰소리로 아뢰었다.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저런 놈의 목을 당장 베어 버리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해양은 오거의 말을 듣더니, 못마땅한 얼굴로 오거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진의 신하된 몸으로서, 내 나라의 왕명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을 뿐이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시오. 대인이 충신이라면, 대인 역시 반드시 나와 같은 태도를 취할 것 아닙니까?"
오거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러자 곁에 있던 장왕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것이 옳은 말씀이오. 하지만 지금의 현실을 직시할 필요도 있는 것 아니겠소? 지금 송성을 에워싸고 있는 우리 군사가 백만이 넘어서, 언제라도 성을 함락시킬 수 있소. 그때에는 무고한 백성들이 큰 화를 당하게 될 것이오. 일이 이러하니 마땅히 대부께서 송왕에게 항복을 권유하여 전화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백성을 위해서도 현명한 일이 아니겠소?" 해양은 왕명을 배반해 가면서 송왕에게 항복을 권유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하지만 이 곤경에서 벗어나 왕명을 수행하려면 일시적이나마 거짓말을 꾸며댈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해 보겠습니다." 한참을 심사 숙고하는 척하던 해양은 거짓 약속을 했다. "내 말을 들어주시겠다니 고맙구려. 그렇다면 어서 송왕을 만나 항복을 권해 보시오." 장왕은 해양을 사마차에 태워 송성으로 보내 주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병사 몇을 뽑아 해양의 해동을 몰래 감시하게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해양은 초군의 포위망을 뚫고 송나라 성문 앞에 이르자, 성루를 올려다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왕명을 받들고 온 진나라의 사신이다. 송왕은 지금 곧 성루에 오르셔서 진왕의 말씀을 들으시도록 아뢰어라."
송왕이 성루에 올라 해양을 굽어보자, 해양은 정중하게 예를 올리고 목이 찢어질 듯이 큰 소리로 외쳤다. "진왕께서는 수일 내로 구원병을 보내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하오니 송왕께서는 어떤 고초를 겪으시더라도 항복만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장왕과의 약속을 뒤엎고 진왕의 명령을 곧이곧대로 전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미행을 하며 감시하던 초나라 병사들이 번개같이 달려들어 해양을 결박지었다. 성루 위에서 그모습을 본 송왕은 부하들과 함께 초군 병사들에게 화살을 날렸지만, 오히려 양유기라는 초군 병사에게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초군 병사들은 해양을 본진으로 끌고 돌아와 장왕 앞에 꿇어 앉혔다.
해양이 약속을 어겼음을 보고 받은 장왕은 크게 노했다. "네놈이 감히 나와의 약속을 어기고서 살기를 바랐더냐? 저놈을 당장 끌어내 목을 베거라!" 그러나 해양은 조금도 겁내는 기색 없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진나라의 신하로서 진왕의 명령을 충실히 받들었을 뿐이오, 그런 내가 어찌 초왕의 명령을 받들 수 있겠소?" "저런 고약한 놈을 보겠나. 어서 저놈의 목을 베지 못할까!" 장왕의 진노는 극에 달했다. 이때 영윤 손숙오가 나서며 말했다. "대왕께서는 진노를 거두십시오. 신하된 자로서 자기 군주의 명령을 충실히 받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비록 남의 나라 사람일지라도 충신을 죽이는 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음..... 그렇다면 영윤이 알아서 처리하시오." 장왕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한 채 진중으로 돌아가자, 손숙오는 해양을 수레에 실어 진나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곧 서릿발 같은 군령을 내렸다. "진의 구원병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른다. 그러니 전군은 송성을 총공격하여 이틀 안에 반드시 함락시켜 버리도록 하라!" 총공격이 개시되었다. 성 안에 있던 송나라 백성들은 식량조차 부족하여 기아에 허덕이는 데다가, 적진에서 화살이 빗발처럼 날아오니 그 비명 소리가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마침내 송나라의 하대부 화원이 송왕의 명을 받들고, 성루에 올라와 초군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송왕께서 곧 성문을 열고 나오셔서 항복 문서를 올릴 것이오. 초군은 잠시 공격을 멈추도록 하시오." 초군이 공격을 머추자, 부상을 입은 송왕이 소복 차림으로 성문을 열고 나오더니 무릎을 꿇고 장왕에게 항복 문서를 올리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본 장왕은 측은한 생각이 들었는지, 송왕을 손수 부축하여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이제 진나라와의 관계를 모두 청산하고 앞으로는 우리 초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갖도록 합시다." "저는 오로지 대왕의 뜻에 따를 뿐입니다." 가뜩이나 부상을 입은 송왕의 안색은 더욱 창백해져 갔고, 그들을 둘러싼 초군들의 함성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이렇게 해서 초의 장왕은 그 위세를 중원 전체에 떨칠 수 있게 되었다.